창릉 (고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창릉은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세조 왕륭과 위숙왕후 한씨의 능이다. 897년에 사망한 왕륭은 영안성 강변 석굴에 묻혔으며, 이후 창릉이라는 능호가 붙여졌다. 1217년 재궁을 봉은사로 옮겼다가 1276년에 다시 창릉으로 이장되었고, 1365년 왜구에게 어진을 탈취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창릉은 벽란도 남쪽에 위치한 창릉포의 지명이 유래가 되었으며, 예성강 강가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보존급유적 제554호로 지정되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려 세조 - 위숙왕후
위숙왕후는 왕륭의 부인이자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로서,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드라마 등의 대중문화 작품에서 자주 등장한다. - 개풍구역 - 개풍군
개풍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에 속했던 군으로, 개성시에 편입되었다가 개풍구역과 판문구역으로 분리되었으며, 삼국 시대에는 동비홀 등으로 불리다가 개풍군으로 개칭되었다. - 고려의 왕릉 - 공민왕릉
공민왕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능으로, 9년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석상과 함께 일제강점기 훼손 후 북한에서 보수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고려의 왕릉 - 고려왕릉
고려왕릉은 유교와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조성되었으며, 석상과 석수 등이 배치된 봉분과 돌담으로 둘러싸인 장방형 능역을 갖추고 있고, 잦은 외침과 도굴로 피해를 입었으며, 2013년에는 일부 왕릉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릉 (고려) |
---|
2. 역사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이전 답변은 빈칸으로 출력되는 것이 맞습니다. 따라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2. 1. 초기 역사
태조 왕건의 아버지 세조 왕륭은 897년(진성여왕 11년) 음력 5월에 금성군에서 사망하여, 영안성 강변의 석굴에 안장되었다.[2] 이후 위숙왕후 한씨도 합장되었으며, 고려 건국 후 '''창릉'''(昌陵)이라는 능호가 붙여졌다.[2]2. 2. 고려 시대
1217년(고종 4년) 음력 3월, 세조의 재궁을 임시로 봉은사로 옮겼다.[3] 1276년(충렬왕 2년) 음력 9월, 다시 창릉으로 이장하였다.[4] 1365년(공민왕 14년) 음력 3월, 왜구가 창릉에 침입하여 세조의 어진을 탈취하였고,[5] 열흘 후 영도첨의 이공수를 시켜 위패를 새로 봉안하게 하였다.[6] 1392년(공양왕 4년) 음력 3월, 창릉을 수리하였다.[7] 창릉에는 능의 수비를 위해 산직장상 2명을 두었다.[8]3. 지리적 특징
벽란도 남쪽에 창릉포라는 곳이 있는데, 이는 창릉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1] 대부분의 고려 왕릉이 산에 있는 것과는 달리, 창릉은 예성강 강가에 있다.[1]
참조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창릉
https://terms.naver.[...]
[2]
서적
고려사
[3]
서적
고려사
[4]
서적
고려사
[5]
서적
고려사
[6]
서적
고려사
[7]
서적
고려사
[8]
서적
고려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